신윤경 컬럼 한라일보 4/24
한라일보] "나를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없는 것 같아요"라는 쓸쓸한 대답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어울리는 사람들은 있지만 친구는 아니라거나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낸다는 이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많은 현대인이 갈수록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게나 자기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데 왜 우울, 불안, 공허는 늘어만 갈까? 아마도 존재란 연결된 관계이고, 이를 타고 흐르는 것이 생명 에너지이며, 이것의 표현이 관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고여 있는 에너지가 병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른다.
현대 사회에 팽배한 물질주의와 능력주의는 감각적 쾌락과 끝없는 경쟁의 콜로세움으로 우리를 내몰고 있다. 특히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하지만 마음을 열고 나누는 일이야말로 충만하고 지혜로운 삶의 필수 조건이다. 인공지능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대신하겠지만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받는 그리고 주는 관계의 기쁨은 인생이라는 바다의 소금과 같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과 학교는 직업을 얻고 돈을 잘 벌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기에 바빠 삶의 근간인 우정의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인간관계인데 가장 서툰 것 역시 인간관계이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마음은 혼자서 수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훈련되는 것이다. 훈련되지 않은 외로운 마음에는 타인과 세상이 자신을 헤칠지 모른다는 불신이 차오른다. 그래서 의지할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 여기며 더욱 단단한 갑옷을 입는다. 가장 필요한 것, 즉 타인과의 친밀한 접촉이 두려워 회피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정치철학자 김만권에 따르면,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해 고립된 이들은 깊은 절망과 자기혐오의 우울을 앓는데 이런 고통은 결국 울화의 분노로 전환되어 세상을 향하게 된다고 한다. 살아있으나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의 분노가 무자비한 '묻지마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고개 끄덕여지는 통찰이다.
언제부터인지 '윤리'가 계몽주의 시대의 낡은 관념처럼 여겨지며 매력을 잃어갔다. 하지만 윤리는 관계의 '도(道)'인데, '길' 없는 삶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두렵고 황량해진다. 선과 악은 우리 내면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이 내적 세계는 혼자서 골똘히 쌓아 올리는 상아탑이 아니라 주변의 타자와 일상에서 주고받는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형성되는 무엇이다. 인간의 자율신경계 역시 타자와의 상호작용 중에 일어나는 상호조절의 기전으로 자기조절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관계가 존재'임은 생물학적 근거마저 있는 셈이다.
관계의 핵심은 '내가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있다. 그리고 이는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본질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관점과 행동에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니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치고 모범을 보일 것은 그 무엇보다 우정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