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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아 < divine powerlessness>

조한 2023.12.10 11:39 조회수 : 169

가장 버려진 사람들과 하느님의 힘 없으심 (divine powerlessness):

취약한 삶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조민아

 

 

가난의 더께

샌안토니오 (San Antonio). 미국 남부 텍사스 주의 도시다. 두번째 방문이었다. 십 여년 전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는 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학회가 열리는 컨벤션 센터 근처 다운타운으로 직행했었다. 기억속의 도시는 화려했다. 샌안토니오 강 지류를 따라 만든 산책로 리버워크 (River Walk)가 다운타운을 가로 지르고, 그 주변으로 화려한 색감의 스페인풍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낮과 밤을 밝혔다. 커다란 솜브레로(모자)를 쓰고 말쑥한 멕시칸 전통의상을 입은 밴드들이 기타와 바이올린을 들고 레스토랑마다 찾아다니며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 어디를 가나 사람으로 북적이던 도시는 활기찼고, 근심 따윈 없어 보였다. 관광지로 유명한 알라모 요새는1836년 미국이 확장정책의 일환으로 이 도시에 살던 멕시코 원주민들을 살상하고 몰아 낸 식민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미국의 승전을 기념하는 샌안토니오의 자랑이 되었다. 주민의 과반수 이상이 이후 국적을 바꿔 잔존한 멕시코인들의 후손이거나,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멕시코계 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관광 안내판도 값싼 임금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지난한 삶과 미국 침탈역사의 상관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방문에서 나는 컨벤션 센터 근처 호텔에 묵지 않고,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신학대학원 피정센터에 숙소를 정했다. 종교학회 외 다른 일정이 있기도 했지만, 호텔보다 훨씬 저렴하고 호젓해서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다. 대중교통이 용이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경전철이나 통근열차가 없어 버스를 이용해야 했는데, 그나마 운행하는 버스도 적어 지도로 보기엔 지척인 거리를 한시간 반 이상 돌아갔다. 대중교통의 발달이 더디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적다는 뜻이다. 이동 조차 쉽게 할 수 없기에, 그들은 갈수록 일할 기회와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돌고 돌아 목적지로 가는 도로 주변에는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무너진 삶의 모습들이 역력했다. 낙후한 건물들. 색 바랜 간판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한 상점들. 다운타운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도시의 이면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에는 대부분 행색이 초라한 라틴계인들과 흑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노숙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둘이나 있었다. 아마도 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을, 대용량 검은 비닐봉투가 이름표처럼 그들 옆에 놓여 있다. 맞은편 긴 좌석에 혼자 앉은 이는 벌써 몇 주 동안 씻지 않은 듯, 간장을 쏟은 것처럼 검고 누렇게 변한 옷을 연신 위로 올리며, 맨 살이 다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몸을 긁어 댔다. 그가 옷을 들썩일 때마다 인간의 것이라고 믿기 힘든 악취가 내 자리까지 몰려왔다. 나는 그 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다른 자리를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무례와 위선 중 위선을 택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자리에 머물렀으나 실은 간간히 숨을 참으며 그의 냄새가 내 감각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나의 속마음이 드러날까 고개를 숙이며, 아니, 그보다는 혹시라도 그가 반응하여 위협적인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지레 몸을 사리며, 또 한편으로는 그의 몸에서 벼룩이나 이가 튀어나와 내 몸에 붙을까 긴장을 하면서 말이다. 혐오였다. 내가 그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혐오였다. 목청껏 혐오를 비판하던 내 안에서, 그토록 취약한 이에 대한 혐오가 거침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 공허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위선과 혐오를 보았을 것이다. 나와 같은 이들의 시선에 적어도 겉으로는 무덤덤해 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순간 모욕을 견디어야 했을까.

 

최후의 만찬

복잡한 생각을 품은 채 버스에서 내려 찾아간 신학대학원 주변도 낙후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 식사 거리를 사기 위해 들린 상점엔 정크푸드와 냉동식품만 가득했다. “가장 버림받은 이들 (the most abandoned)”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이 학교의 넓고 아름다운 캠퍼스는 지역 주민들이 공원처럼 이용할 수 있도록 늘 개방되어 있었다.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주민의 대다수인 지역 답게 캠퍼스 중앙의 그로토엔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모셔져 있었고,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촛불을 밝히며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내 눈에 무엇보다 인상깊게 들어온 것은, 그로토와 좀 떨어진 곳에 설치된 조각상 이었다. “노숙자 예수상으로 유명한 캐나다의 조각가 티모시 쉬말츠 (Timothy P. Schmalz) 작품, “최후의 만찬이다. 돌로 깎은 커다란 테이블 주변에 역시 돌로 깎은 열두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고, 그 가운데 홀로 앉아 떡을 떼고 있는 예수의 청동상이 있다.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열린 그의 식탁을, 교회 안도 아니고 박물관 안도 아닌, 누구나 앉을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에 설치한 작가의 마음이 나는 고마웠다. 비가 오고 천둥 번개가 치는 궂은 날에도 예수는 저기 홀로 앉아 상처 받은 영혼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떡을 떼고 있을 것이다.

 

식탁 위에 무언가 잔뜩 놓여 있어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려는데 반대쪽에서 아마도 주민인 듯 보이는 한 남자가 조각상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발을 멈추었다. 남자는 익숙한 일상인 듯 주저함 없이 예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입을 맞춘 후, 갖고 온 생수 한통을 그의 앞에 놓고, 도시락을 꺼내 예수 앞에 놓인 접시에 덜었다. 그리고는 맞은편으로 건너가 다정한 친구처럼 그를 바라보며 자기 몫의 점심을 먹었다. 아무럴 것 없어서 오히려 경건하게 느껴지는 그의 식사에 방해가 될까 나는 다가갈 엄두를 못 내고 다만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다시 예수에게 다가가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자리를 떴다. 그제서야 빈 식탁에 다가갔다.

 

예수의 접시엔 아마도 그 남자가 덜어 놓았을 감자튀김이 담겨 있었다. 감자튀김만이 아니었다. 낡은 묵주, 타다 남은 초, 손바닥만한 기도서, , 작은 십자가접시와 그 주변엔 이 식탁에 앉았다 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나는 물품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이 식탁에 왔던 이들이 저마다 간절한 소망을 담아 남기고 간 이 물건들일 것이다. 취약한 삶에서 떨어져 나온, 그 삶의 온기가 남아 있는 조각들. 나는 가방을 내려 놓고 그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예수의 접시 앞으로 모았다. 그러다 식탁 아래 흩어져 있는, 노트 몇 장을 찢어 쓴, 익명의 그 편지를 발견했다. 바람에 쓸려 떨어진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내밀한 사연을 허락 없이 읽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실례를 범했다. 급하게 갈겨 쓴 글씨였다. 문법도 맞지 않았다. 같은 필체였지만 페이지 마다 다른 날짜가 적혀 있었고, 펜의 색깔도 달랐다. 적어도 서너 번은 이 곳을 찾은 듯 했다. 편지의 주인은 딸아이 둘을 가진 싱글맘인 것 같았다. 그녀는 서류 미비자였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수 없어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는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며 다가온 남자가 있었다. 자신과 딸들의 신변을 그에게 의탁했다. 그녀의 가족을 받아들인 남자는 결국 그녀를 강간하고, 큰 딸마저 강간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딸을 범한 그 남자에게 계속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인 듯 했다.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었을 그 사연을 품고 그녀는 예수의 식탁을 찾았던 것이다. 이슬에 젖어 종이가 축축한 것으로 보아, 아마 그녀는 밤 늦게 혹은 이른 새벽 사람이 없는 새를 틈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말 없이 홀로 앉아 있는 청동 예수 앞에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쏟으며 피를 토하듯 편지를 남기고 자리를 떴던 것이다. 몇 번을 그랬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모아 예수의 식탁에 올려 놓고, 날아가지 않게 돌로 괴었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머리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자신과 딸을 강간한 남성에게 여전히 몸을 맡겨야 하는 엄마의 마음을. 다만 살기 위해, 딸들을 살리기 위해 내려야 했던 선택에 무슨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그 두려움과 무력감과 설움과 분노와 수치와 자책을 감히 어떤 언어로 담아 낼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은 채로 남아야 한다. 나는 도망치듯 그 식탁을 떠났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처럼. 예수만 홀로 남긴 채.

 

가장 버려진 사람들, 힘 없으신 하느님

샌안토니오에서 돌아온 뒤 며칠이 지났지만 그 취약한 삶의 모습들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무언가 글로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내 언어는 좁고, 얄팍하고, 차갑다. 악취 나는 옷을 입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버스에 앉아 있던 노숙인을 혐오했던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과 딸을 범한 이와 한지붕에 누워 목숨을 부지하는 어미가 쓴 편지를 읽고 도망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안전하고 따뜻한 내 원룸 스튜디오의 어느 것 하나, 내 식탁의 삼시 세끼 어느 것 하나 그들의 삶에 빚지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들이 잃어 버리고 빼앗긴 것과 무관한 것이 없을 텐데, 내가 감히 그들의 무엇을, 어떻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토록 처참하게 버려진 이들에게 과연 어떤 위로와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당신들에게도 좋은 세상이 올 거야,’ 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 누구의 고통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나조차 확신할 수 없는 좋은 세상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희망과 위로를 길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위선에 대해, 나 자신의 취약함과 불가능성 때문에 이 글을 쓴다. 그리고, 갈수록 절망이 깊어지는 세상에서 나처럼 무력감을 느끼며, 그러면서도 가장 버려진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 내리는, 스스로의 모순을 어찌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쓴다. 무너진 삶들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내 통장의 잔고를 걱정하는, 생떼 같은 아이들을 바다에 묻고 거리에 묻은 부모들과 함께 울면서도 내 가족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차별금지법에 서명하면서도 내자식이 성소수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낯선 땅을 찾은 난민들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내 집으로 불러 밥 한끼 차려 내기는 망설여지는, 기후 재난으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땅과 생명들을 보면서도 음식을 남기고 일회용품을 사용하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쓴다.

 

우리는 너무 쉽게 희망과 진보를 이야기한다. 역사의 종말을 미리 보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찬란한 승리주의적 서사를 만들어 내며 을 성토하고 을 비난한다. 그리고 그 승리의 서사로부터 스스로의 어둠을 도려내고, 내 안에 숨어 있는 차별과 혐오를 외면한다. 마치 나는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나의 어둠으로 인해 해를 입고 상처를 받을 이들은 없는 것처럼, 내가 누리고 있는 안전과 풍족함은 선한이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그렇게 만든 승리주의적 서사에 우리는 기꺼이 미래를 건다.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물러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기기라도 할 듯한 환상을 품는다. 그러나 그런 변증법적 낙관을 길이 이루어 낸 역사가, 끝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역사가 우리에게 과연 있었는가? 태양이 작렬하는 뜨거운 정오가 지나면, 슬금슬금 꼬리를 빼며 나오기 시작하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이미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진보와 해방을 목청껏 외치며 악인들을 성토하는 와중에, 그들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실은 그들의 힘을 동경해 오지는 않았는가? 탐욕과 기만으로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을 노려 보며 우리도 어느새 그 얼굴을 닮아가고, 그들의 말을 흉내 내고 있지는 않은가? 뉘우침을 가장하여 고해소를 들락거리면서도 얼굴을 바꾸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는 악인들을 비난하면서, 우리도 어느새 그 앞에 줄을 서고 있지는 않은가?

 

취약한 삶들을 바라보며, 그 삶들이 민망하도록 환하게 드러내는 나의 위선과 모순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제 나는, 우리는, 어쩌면 그 위선과 모순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위선과 모순으로 흔들리는 우리 스스로의 취약함으로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버려진 이들을 버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가장 버려진 이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 하느님은, 전지하고 전능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의 하느님이 아니다. 가장 긴박한 순간에 나타나 우리의 바램 대로 징벌과 승리를 내리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 하느님은 힘 없는 하느님이다. 세상을 멸하는 대신 십자가를 택한 하느님이다. 자신의 시신이 누운 돌무덤 조차 비운 채 상처 난 몸을 끌고, 가장 버려진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갔던 하느님이다. 전쟁과 가난이 망가뜨린 마을 한복판, 차가운 식탁에 홀로 앉아, 부끄럽고 슬픈 이들이 찾아 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떡을 떼는 하느님이다. 성급한 위로와 희망을 주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판단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하느님이다. 그렇게 당신의 힘 없으심을 통해 죄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느님이다. 가장 힘없는 자들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이다. 위선과 모순을 통해 은총을 내리시는 하느님이다. 인간의 선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이다. 바로 그 하느님과 마주 앉아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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