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인 인터뷰 글 -노워리 기자단
[인터뷰] 희망은 발견하는 게 아니라 품는 것 - 조한혜정 교수님
2023년 가을 “우리가 우리를 구하는 이야기”라는 주제 아래 18기 등대지기학교가 막을 열었다.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조한혜정 선생님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교육 - 모성적 사유와 돌봄의 실천’이라는 주제로 5강 현장 강의를 맡아주셨다. 선사시대부터 현대문명에 이르기까지 문명사적 접근을 통해 폭력적인 문명을 성찰하고, 돌봄의 공공성과 실천을 모색하는 시간이었다. 강의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듣고자 선생님께 인터뷰를 청했다.
안정인(이하 안): 조한혜정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노워리기자단 안정인입니다. 십여 년 전 대학원에 다닐 때 선생님 수업을 들었는데요, 이렇게 다시 뵐 기회가 생겨 무척 기쁩니다. 먼저 선생님 근황이 궁금해요. 은퇴 이후에 제주로 내려가셨다고 들었는데 왜 다른 곳이 아닌 제주를 선택하셨나요?
조한혜정(이하 조한): 제가 ‘또 하나의 문화’부터 시작해서 ‘하자센터’나 ‘성미산 학교’ 같은 대안교육 운동을 해왔잖아요. 오래 지켜보니 작은 대안학교 하나로는 안 되고, 마을이라는 굳건한 베이스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마을에 들어간 대안 학교들은 잘 운영돼요. 현재 우리의 삶이 오징어게임처럼 너무 치열하잖아요. 그럴수록 노아의 방주 같은 대안마을, 우정과 환대의 시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어요. 제주는 생태적 삶에 관심이 있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 제주가 괜찮은 삶의 터전이 될 수가 있는 거죠. 제주에서 지내다 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서울에는 자주 안 오게 되네요.(웃음)
17명이던 초등학교가 100명이 넘기까지
안: 구체적으로 어떤 재미난 작당을 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조한: 50~60대 여자들하고 재미있게 놀고, 칼럼도 쓰고요. 출판사를 하는 친구가 책을 잔뜩 보내줘서 조그마한 나무늘보 도서관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냥 널브러져서 책 읽으라고 하고 저는 애들을 관찰하지요. 엄마나 아이들 대상으로 재미난 프로그램 있으면 같이 하기도 하고요. 느슨한 공동체예요. 제가 사는 선흘에 ‘레이지마마’라고 육지에서 온 가족들 한 달 살기 프로그램 하는 곳이 있는데 요가부터 승마, 생태 수업 등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어요. 여기가 지금 새로운 학습터전이 되고 있거든요. 선흘초등학교는 원래 17명이었는데 지금은 학생들이 100명이 넘어서 본교가 됐어요. 선생님들이 정말 열심히 하시고요.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요, 저랑 작업장을 같이 쓰는 친구가 ‘테이크아웃 드로잉’이라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예요. 그 친구가 할머니를 정말 좋아해서 마을에서 할머니들이랑 살면서 함께 그림을 그려요.
안: 아, 책으로도 나왔죠? 『할머니의 그림 수업』.
조한: 맞아요. 정말 중요한 건 진심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같아요. 우리가 계속 톱-다운 방식으로 뭔가를 기획하고, 기획을 위한 기획을 해서는 이게 나오지 않아요. 할머니들이랑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고 미장원도 같이 가고, 아프시면 병원에 모셔다드리고요. 동네에 사니까 그런 게 가능해요. 요즘 ‘15분 도시(시민 누구나 15분 이내에 문화·의료·교육·복지·여가 시설 등을 이용할 수 있는 구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제도나 정책보다 관계에서 그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 제가 선생님 인터뷰하려고 자료 조사하다가 최근 사진과 영상을 찾았는데요, 제주에서 뒤로는 멋진 집들이 배경으로 있고 해질녘에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처럼 식탁을 길게 놓고 다 같이 둘러앉아서 식사하는 사진이 참 좋아 보이더라고요. 추석 때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손잡고 강강술래 하는 영상도 정겨웠고요.
조한: 그러니까요. 경기도 광명에 있는 대안학교인 볍씨학교 고학년 학생들이 1년간 선흘에 있는 제주 학사에서 지내는데요. 거긴 진짜 이 세상이 다 망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노아의 방주 같은 교육을 하는 곳이에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가마솥 밥을 짓고, 동백동산을 뛰어갔다 오고, 그다음에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다 같이 낭송해요. 밤샘 토론을 통해서 서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요. 그러다 볍씨학교 학부모 18가구가 제주에 협동조합 주택을 지었어요. 같이 산 지 3년이 되었고요, 볍씨 마을이 생긴 거죠. 그분들이랑 추석을 보낸 거예요. 이런 삶이 얼마든지 가능한데 요새는 워낙 다들 바쁘고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자랑하기도 좀 멋쩍어요. 계몽주의 시대에는 앞서가는 사람을 보면서 다 따라 했는데 요즘은 너무들 시간이 없잖아요. 따라 할 시간조차 없는 거죠.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가는 게 잘 사는 것
안: 아까 등대지기 학교 강의 들으면서 5,000년 인류 역사를 ‘사냥꾼의 시대’ 대 ‘돌봄의 시대’로 쫙 정리해서 보여주셨잖아요. 파상(破像: 기존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의 시대에 전환의 필요성과 방향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통찰력 있는 강의였어요. 저는 선생님 강의 자료가 예전에 공부했던 자료가 아니라 최근에 출간된 소설이나 에세이, 신작 드라마, 영화, 유튜브 영상까지 다양하게 자료를 가지고 오시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조한: 지금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하니까 관심을 두고 보다 보면 다 걸리게 돼요. 사실 요즘은 인류학자가 현장을 안 가도 되는 시대가 된 거잖아요? 온라인에서 다 찾을 수 있으니까요. 아이가 있고 손자까지 있으면 그 아이들을 통해서 줄줄이 연결되고요. 아마 아이들이 없었으면 다른 영역에서 열심히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쨌든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 혼자 잘 살다 가는 게 아니라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가는 게 잘 사는 거죠.
안: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게 잘 사는 것이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해요. 그런데 세상이 점점 나빠져 가는 것만 같아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위협하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기후 위기는 점점 심각해지고요. 선생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디서 희망을 발견하시나요?
조한: 희망을 발견하지는 않죠.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어요. 김대중 정권 들어서고 하자센터 만들고 아이들이랑 지낼 때는 정말 신나는 시간이었어요.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금융자본이 권력을 잡고 있고 사람들을 엄청나게 바쁘게 만들잖아요. 한국은 입시 교육이라는 이상한 제도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갈 시간을 더 빼앗고요. 북유럽의 여자 수상들 소수를 제외하고는 정치에서 새로운 게 나올 수도 없어요. 그럼 어디서 나올 거냐 하는 건데, 지금은 시민들이 각성하고 모여서 하나의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경험을 해야 그다음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희망이 점점 없어지지만 국민국가 차원의 제도개혁, 혁명 이런 게 아니고 완전히 다른 형태의 상호 돌봄의 세포가 마을 단위에서 생기면 거기서부터 뭔가가 일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는 거죠.
안: 아까 강의에서 말씀하셨던 도나 해러웨이의 “망가진 행성에서 책임을 지고 살아가기”, “곤란함을 살아내다”, “기쁨의 실천” 말과 같은 맥락이군요?
조한: 맞아요. 대부분은 아예 인식하지 않고 그 시스템 내에서 살든가, 인식한 뒤 절망해서 살 수가 없다거나 하는데 이젠 곤란하다는 걸 인식하면서 살 수 있어야 되는 거죠.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미리 만든다
안: 강의 중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미리 만든다”는 말씀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조한: 그렇죠.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어떤 사람은 대통령을 새로 뽑아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계속 관찰하고, 실험하고, 그것을 퍼뜨리고, 또 통합시켜서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노력으로 대안학교를 만들 때가 있었고, 지금은 대안학교보다 진짜 남녀노소가 다 같이 어우러져서 15분 거리 내에서 상부상조하고 각자의 존재로 만나고 살고 죽고 하는 그런 마을을 꿈꾸죠.
안: 선생님 말씀에 동의하는 게 제가 영국에서 거주할 때는 동네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매일 등하교할 때 부모나 조부모 혹은 다른 양육자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아이들 기다리면서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를 나누게 되는 거예요. 애들 친구 엄마가 내 친구가 되고 서로 집에도 왔다 갔다 하고 플레이 데이트도 하고요. 힘든 일 어려운 일 있으면 서로 돕고 했는데 한국에 오니까 오히려 더 외롭고 고립된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다 이웃에 한 가정을 만나고 나니 삶의 질이 확 올라갔어요. 서로 만나 가족끼리 밥도 같이 먹고 급할 때 서로 아이들도 봐주고요.
조한: 그럼요. 두세 집만 있어도 되잖아요. 그게 사회관계망이고 일종의 보험인데 요즘 그걸 안 해봐서 점점 더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세계 전체를 바꾸고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조그마한 세포가 완전히 달라지는 형태로 가야 해요. 그래서 제가 프랙탈(fractal: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세포가 새롭게 만들어져야 해요. 내 자리에서 정말 다른 삶이 생성되어야 하죠.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인 세상을 꿈꿉니다.
안: 마지막으로 요즘부모연구소에 저처럼 초등학생 아이들을 키우는 학부모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요즘은 여자아이들은 아이돌 댄스, 남자아이들은 게임 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고민이 돼요.
조한: 아이돌 댄스나 게임을 못하게 하기보다는 다른 좋은 활동을 더 권장하는 거죠. 아이들 스스로 재밌어하는 게 많아야 하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점점 수동적으로 되는 것 같아요. 엄마 노릇도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고요. 점점 도구적 모성이 되는 것 같고요. 그냥 아이랑 앉아서 서로 정을 나누는 게 중요한데 말이에요. 요즘 조부모들도 애 안 봐준다고 하는데 봐주고 안 봐주고 아니고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잖아요. 같이 시간을 보내고 걱정을 서로 의논하는 관계들. 내가 남에게 도움을 주고,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는 과정 자체가 자기 존재에 대한 감각을 형성하지요.
시대를 읽고 실천적 담론을 만들어 낸 조한혜정 선생님은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미리 만들고 계셨다. 인터뷰를 하면서 희망은 발견하는 게 아니라 품는 것,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말씀이 깊이 와닿았다. 각자 선 자리에서 만드는 돌봄의 관계망, 우정과 환대의 시공간을 짓는 것만이 너와 내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긴다. 내 삶의 단위에서 어떻게 실천할지 고민의 씨앗을 던져주신 조한혜정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 인터뷰. 노워리기자단 안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