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e frame female pictures
영어책 introduction
그간에 내가 쓴 영어 논문을 모아 책으로 내자는 이야기는 많았는데 게으름을 피웠다. 한국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81년부터 2016년까지 25년에 걸쳐 쓴 글들인데 나 자신 문화변동을 실천적으로 이끌어내느라 바빴기도 하고 적절한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지금이 그 타이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내게 ‘우리 말’로 쓰는 글은 ‘지금 바로 여기에 함께 있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향해 쓰는 글이다.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분석은 하려고 노력하지만 탐정도 용의자의 한 사람인 듯, 연구자 역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를 가기를 바라는 방향성에 대한 바람이 있고 그래서 처방이 있다. 반면 ‘영어/외국어’로 쓴 글은 ‘우리’라 부르기에는 경험과 지식의 공유가 부족한, 그래서 ‘우리’가 아닌 ‘너희’를 위해 쓰는 것이다. 시대적 맥락을 설명하고 번역하기 힘든 개념을 친절하게 풀어쓰면서 그가 속한 시간과 나의 시간 사이에 ‘바 동시성’을 십분 고려한 글을 써야 한다. 여기에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우리’가 있고 그 ‘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이 ‘우리’를 염두에 두고 가주어야 한다.
내가 속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고 싶어 하는 나는, ‘우리 말’로 ‘로컬 한’ 텍스트를 쓰는 것에 만족하는 ‘native 인류학자’이지만 해외 강의에 초대받아 나갈 때도 많아서 영어로 쓴 논문들이 꽤 되었다. 유학을 막 끝낸 초반에는 영어로 직접 썼지만, 후반에 와서는 모든 것을, 영어를 통해서 하고 미국에 가서 학술회의를 하는 것이 싫어서 논문은 한글로 써서 번역 작업을 거치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처럼 영어권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귀국 후 영어에 대한 감이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보다도 아시아 지역의 학문 간 교류가 깊어지면서 한국어로 써야 중국, 일본어로 번역이 더 쉽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즈음 대만의 첸관싱과 싱가포르의 추와 벵 후아, 일본의 이와부치 고이치 등 동아시아 삼국의 학자들이 모여 활발한 교류를 시작했으며 그 결과 interasia cultural studies 학술지도 내는 등 연구자의 활동 범위가 크게 변하고 있는 때이기도 했다.
한국의 민중 개념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 동아시아 관련 후학들을 열정적으로 키우고 있던 동료 인류학자 낸시 에이벌만은 누구보다 영어로 된 한국 책이 필요하다며 영어 논문집을 출간하자고 서둘렀다. 낸시 에이벌만은 원래 일본의 불교문화를 연구하려고 일본말까지 배우고 일본으로 떠날 참이었는데 한국에서 민중 운동이 일고 그 ‘민중’ 개념에 꽃혀서 한국으로 현장을 바꾼 경우이다. 그가 제안한 책 제목은 [Learning Korea]와 [Male Frame, Female Picture]였고 책의 주제어는 compressed modernity, ethnography, feminism으로 잡았었다.
근대화란 두 개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왔다. 안으로는 왕을 죽이고 국민이 그 자리에 오른다는 사상으로 만들어지는 민주 공화정 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이 될지 제국에 먹혀 식민지가 될지를 정하게 되는 약육강식의 세계 체제다. 세계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을 위해 각축전을 벌이던 19세기 말의 Korea는 일차 근대화 대열에 끼지 못했다. 그리스·로마 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유럽 중심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가 아닌 나라이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일본제국이었다. 조선은 서구 세계에서 동양의 조선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작고 미개한 나라’였다. 조선은 소련과 프랑스와 일본 등 열강이 탐을 내던 먹잇감이었는데 세계열강의 각축전에서 살아남은 이웃 일본이 – 봉건영주들의 피나는 전쟁으로 갈고닦은 무력과 정략으로- 낚아채서 먹어버렸다. 조선은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서 공식적으로는 36년간 지배를 받았다. 조선으로서는 역사적으로 섬나라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이웃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치욕과 모멸감을 느꼈고 한일 합병의 날을 국치일이라고 불렀다. 나의 외가 쪽 큰할아버지는 일본에서 근대 의사 수련을 마치고 있었는데 국권 피탈 소식에 중국 친구와 신해혁명에 참여하겠다고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나의 외조부모님은 일본제국의 질서에서 살기보다 서구 기독교를 택했다. 일본제국보다 막강한 기독교 신의 질서를 선택하고 고아와 과부와 병자들을 돌보면서 일본제국과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의 삶을 선택했다.
서구 열강들이 벌인 세계 대전이 전쟁이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마침내 끝나고 나의 외조부님들과 조선식인지 주민들과 전 세계는 잠시나마 승리의 환희를 즐겼었다. 하지만 곧 승전국들은 다시 지도를 놓고 약소국들을 나누기 시작했고 조선 Korea는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에 들어갔다가 급기야 남북으로 갈린 분단국가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전 직후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 중심의 사회주의권의 사회부조적 분위기 속에서 북조선은 빠르게 경제성장을 했는데 미국의 구호 아래 있었던 남한은 정치적 부패와 가난에 허덕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성장이 빨라지는 한편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가 침체하면서 남쪽에 있는 ‘불쌍한 나라 Korea’가 세계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후발 주자 국가들의 모델 국가로 추앙을 받고 있기도 하다.
강압적 지배를 받으며 후발 주자로 근대화를 서두르게 된 경우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목표를 세워서 사회발전을 해가기보다 무조건 ‘따라 한다’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그 약육강식의 역사 속에서 패배자로 살면서 생긴 문화적 적응의 방식을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대부분이 모방 근대화와 패배주의를 넘어서자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한때는 그것이 가능해 보였다. 아니 지금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2008년 월가 파동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은 거세졌고 나는 ‘문화’가 아니라 ‘돈’이 지배하는 세계가 코앞에 다가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류’의 물결이 출렁하기 시작했고 나는 한류가 문화인지 산업인지를 물으면서 문화로서의 한류 바람이 불기를 기도했다. 인터넷이 어느 나라보다 빨리 깔리게 된 상황적 조건을 십분 활용하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추진해 낸 정부와 국민,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깊이 있는 성찰성을 담보한 작품을 생산하게 된 영화계와 대중문화 산업계의 주역들, 그리고 수시로 폭력적 정권에 맞서 싸움으로 민주주의의 흐름을 형성한 시민들의 저항 문화는 1차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양상의 근대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거친 민주화 투쟁과 투쟁에 사용된 노래와 구호는 홍콩과 대만 등지에서 현지화되어 시민적 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고도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비극적 사건은 지속해서 일었다. 2014년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 다수가 배의 침몰로 사망한 사건을 통한 각성, 그리고 2022년 이태원 할로윈 참사를 겪으며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시민들은 2024년 12월 ‘이상한 대통령’의 두 시간짜리 계엄 사태로 더욱 성숙해져야만 하는 상황을 맞았다. 국가가 더 이상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한 국민의 행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민주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상상력, 또는 파상력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