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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아라 원탁회의 개헌 절차법 발표회 축사

조한 2026.04.28 23:12 조회수 : 0

20260506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대강당

<아라 미래 원탁회의> 개헌 절차법 발표회     

**축사**     

조한 혜정 (문화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제주대 로스쿨 원생들이 ‘풀뿌리 원탁회의’ 방식의 국민 참여를 보장하는 ‘개헌 절차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뻤습니다. ‘대의 민주주의’의 막장 드라마를 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정치를 실현해 가야 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 동료 교수는 “10대를 어떻게 보냈는지가 인생을 결정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저는 대학 시절에 했던 열정적 작업이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개헌 절차법 제정 작업을 발표하는 원생들은 앞으로도 분명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낼 분들이라는 덕담을 미리 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국민·시민·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헌법에 새길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참으로 희망적입니다.     

 

이 개헌 프로젝트는 아주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신용인 교수팀이 시민들과 함께 시작한 <천년의 꿈, J-로드맵>이라는 프로젝트와 연결해 보면,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천년을 내다보는 아주 소중하고 거대한 과업입니다. 탐라에서는 3만여 년 전부터 인간 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수천 년 전 국가의 형태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건국 신화로 보는 탐라국의 시작은 대륙/육지의 신화와는 좀 다릅니다. 시조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나고,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입니다. 바다 건너에서 온 세 공주와 결혼한 이들은 씨앗을 전해 받고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지요. 한 명의 독주가 아닌 셋, 나아가 여럿의 공존, 그리고 낯선 곳에서 온 공주들을 맞이함으로써 “밖에서 온 문물”과 “토착적 삶”을 결합해 내는 질서가 탐라국의 특성이었습니다. 정복국가적 육지 문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치국이었던 탐라국은 1273년 고려 말 삼별초의 난을 거쳐 고려-몽골 연합군 치하에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동아시아 제국 네트워크에 편입됩니다. 오래된 자치 체제에 금이 가면서 탐라는 강대국의 전략 거점으로 활용되는 지정학적 격변기를 거치게 됩니다. 근대에 들어 제주도는 행정적으로 완전히 한국 국가체제에 편입되는데, 그 과정에서 비극적 사건을 겪게 됩니다. 4·3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탐라 제주 사회는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중앙 국가와 변방 공동체의 충돌, 그리고 승자독식/약육강식의 질서가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듯한 지금, 학자들은 돌파구를 찾기에 골몰합니다. 문명학자 Jeremy Rifkin은 최근 저서 <플래닛 아쿠아>에서 약 6,000년간 이어진 인류의 도시 수력 문명, 즉 물 중심 농경 인프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댐, 보, 제방 등 물을 길들이던 인프라가 기후 변화로 인해 붕괴하고 있다면서 ‘대지의 행성’에서 ‘물의 행성’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을 가두는 방식에서 벗어나 물과 공존하는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화석연료에 근거한 중앙 통제적 문명은 붕괴할 것이며, 대신 태양광·풍력·분산형 전력망 같은 재생에너지가 수평적이고 협력적인 사회 구조를 촉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탐라국은 어느 문명에 속할까요? 탐라는 화산섬이며 집약농업을 위한 수력 문명권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 탐라국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탐라는 밭농사를 짓는 작은 섬 왕국이었고, 자치적 거버넌스가 강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탐라는 단순한 주변부가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통해 다양한 세계와 연결하면서도 독자적 질서를 유지한 해양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탐라를 떠올린다는 것은 중앙집권·육지 중심의 역사관 밖에서 좀 다른 삶의 방식, 보다 자율적이고 공생적인 공동체 모델을 상상하는 일입니다.     

 

작년 제주대학에서는 바로 이 주제로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군도적 전환과 다른 아시아들—문학, 정치, 문화 속의 행성적 돌봄 planetary care>라는 주제로, 지난 수천 년간 지구상을 지배했던 ‘대륙의 세계관’이 망가뜨린 지구 행성을 ‘섬들의 세계관’을 통해 어떻게 다르게 관계 맺어갈 수 있을지를 묻는 자리였지요. “육지에서 해양으로, 대륙에서 섬으로”라는 취지 아래 모인 비판적 섬 연구 학회(CIS, Critical Island Studies) 다섯 번째 모임의 기조강연자는 Gayatri Chakravorty Spivak이었고, 그곳에 모인 이들은 그리스·로마 제국 시대 이후 대륙이 주도해 온 파국의 문명을 넘는 대안을 ‘군도적’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가 그 ‘군도적 전환’ 학회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천년의 꿈’을 꾸며 중앙집권·대륙 중심 폭력 국가의 역사 밖에서 탈중앙적 삶의 방식과 공생의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장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릴 때 저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지금도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할까요? 평화와 공생을 원한다면 우리의 구호는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가 아닐까요? ‘풀뿌리 원탁회의’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지방분권적 전통을 가진 탐라국 제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참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될 풀뿌리 원탁회의 법을 통해 탐라의 자손들이 ‘천년의 꿈’을 실현하는 길을 터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길고 복잡한 축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난세의 청년들이 빛의 길을 터주기를 바랍니다. 그 길 위에서 탐라의 천년의 꿈도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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