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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이후의 시대를 이미 살아가고 있으니 (조한 두번째)

조한 2026.04.27 07:52 조회수 : 0

우에노 지즈코와 조한혜정의 편지 교환 2

 

<제국 이후의 시대를 이미 살아가고 있으니>

 

지즈코,

지구 저편에서는 마구 폭탄이 터지고 있는데 이렇게 편안히 지내도 되나 싶습니다. 전쟁 30일째, 사망자 이란 1,750, 어린이 220, 친이란 주변 800여 명, 미군 13, 이스라엘 15. 2차 대전은 끝났다면서도 우리는 한국전쟁을 비롯해 작은 전쟁, 큰 전쟁을 계속 치르고 있습니다. 하인리히 법칙은 300건의 작은 사고와 29번의 중간 사고 이후에는 아주 큰 사고가 온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상황은 그 임계점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잔인한 4월이 왔고, 오늘따라 들고양이들은 왜 저렇게 울고 있는지…… 이런저런 불안으로 잠을 설치는 내가 이 글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지즈코가 꺼낸 국가 수장이 된 여자들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해요. 지즈코가 기억하는 대로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첫 여성 대통령을 반기지 않았어요. 그녀는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서 대통령 아버지를 수행했던 딸이었죠. 당시 칼럼에 생식기가 여자면 다 여자냐?”라는 식의 표현을 써서 한 남성 심리학자가 곤욕을 치렀던 일도 있었고, 나이 많은 택시 기사가 왜 여자들이 여자 대통령을 뽑으려 하지 않지?”라며 화를 내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선거본부는 그녀를 위기에 강한 대통령으로 부각했어요. 거센 폭우 속에 곧 뒤집힐 것 같은 선박들을 배경으로 이런 카피가 떴었지요. “경험 없는 선장은 바다를 피해 가지만 경험 많은 선장은 파도 속으로 들어갑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기에 강한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동북아 평화를 이끌어갈 리더십! 준비된 대통령 기호 1번 박근혜!”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 역시 위기 상황을 돌파할 인물로 간택된 사람이었죠. 1987년에 나는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곳 친구들이 영국에 남자는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사람이 마거릿 대처라고들 했었지요. 나는 그녀의 경우를 남성 중심 정치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대처 총리를 존경한다는 다카이치 총리는 비슷한 경로를 가게 되지 않을까요?

 

다행히 전후에 중립을 선언한 북유럽에서는 1980년부터 여성 리더십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어요. 노르웨이의 그로 할렘 브룬틀란, 아일랜드의 메리 로빈슨, 핀란드의 타르야 할로넨,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등이 등장하여 국민의 소리를 듣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젊은 여성 정치가들이 뒤를 이으며 삶의 취약성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의 장이 열리는 듯했습니다. 그즈음 나는 청소년 교류 일로 번질나게 북유럽을 다녔는데, 수더분한 모습의 여성 지도자들을 뉴스에서, 국제회의에서, 때로는 직접 만나면서 가슴이 부풀었었어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여성 리더십은 더욱 빛났습니다. 여성 지도자들이 전문가 의견을 경청하며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동안, 영국, 브라질, 미국, 그리고 이란 등 권위적 남성 지도자들은 독선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며 재난을 더 키웠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나는 그때 세상이 크게 바뀔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어요. 뉴질랜드의 저신다 아던 총리는 더 이상 충분한 에너지가 없다고 말하며 임기 중 사임했고, 핀란드와 스웨덴은 오랜 중립 전통을 접고 NATO에 가입했습니다. 세계는 다시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질서로 들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변화는 단지 특정 정치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을 독점한 절대권력자들의 등장과도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학자 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포식자들의 시간AI 시대, 절대 권력의 설계자들(2026)이라는 책, 읽어보았나요? 문화 부시장, 총리 고문의 자격으로 최고 정상 회의를 포함한 자리에 자주 초대되었던 작가는 책에서 그런 자리를 무법자처럼 휘젓고 다니는 기술 권력자들의 행태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키신저와 관료들과 기업 대표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울트만과 하사비스 등 테크노 CEO들의 행보를 관찰해 온 그는 그들을 새로운 포식자라고 부르고 그들이 모인 자리를 싸움에서만 생의 의미를 찾는 가장 폭력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내죠. 다 엠플리는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인들을 마키아벨리 시대의 냉혹한 군주 체사레 보르자에 빗대 보르자 형 인간이라고 부르고, 현 세계 상황을 16세기 코르테스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아스테카 왕국에 비유합니다. 기술 권력과 정치권력이 강력한 동맹을 맺으며 세계를 재편하는 중인데 무력한 정치가들은 손을 놓고 있는 것이죠.

 

국내 역사학자 이병한도 비슷한 논의를 펼치고 있어요. 그는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이라는 새 책에서 기술 권력자들의 행보를 자세히 분석하면서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민주공화국>의 시대는 가고 <기술 공화국>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막강한 K power를 갖게 된 한국이 이번에는 제대로 활약을 해보자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공화국 시대가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고 그다음이 기술 제국이라면, 그리고 앞으로도 정치판이 여전히 남자들만의 판이라면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설국열차>에서처럼 인류는 조만간 파국을 맞이하게 될테지요.

 

지즈코는 앞으로 어떤 정치체가 등장할 거로 생각하나요? 1970년대 내가 미국에 유학할 때 반전 운동이 크게 일었고, 가부장제의 기원을 다시 묻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인간 사회의 진화를 사냥 중심으로 설명하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채집과 양육, 살림의 활동을 포함해 다시 구성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일었지요. 그때 일정하게 합의되었던 그림은 이렇습니다. 수렵채집 사회는 자연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 두세 시간 일하면 잘 살아가는 사회였고, 성역할 분업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극단적이지 않았습니다. 초기 경작 단계에서는 남자가 개간하고 여자가 작물을 키우는 식의 역할 분담이 있었지만, 남자들도 함께 일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평등한 사회였지요.

 

그러나 집약 농업이 시작되고 부의 축적이 가능해지면서 권력이 집중되고 왕이 등장합니다.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여성들은 새롭게 형성된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기 시작했고, 전쟁을 통해 부강해진 왕은 점점 더 땅을 넓히며 강하고 큰 제국을 건설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문명사회라고 불러온 포식자들의 시대가 열렸고 우리는 국민 학교를 다니면서 그 정복자들의 이름을 외워야 했지요. 고대 아테네 역시 노예와 여성, 외국인을 배제한 남성 중심 공화국이었지요. 로마제국을 탐독하고 삼국지손자병법이 여전히 삶의 전략서로 읽히는 현실은 우리가 아직도 그 제국의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앤서니 기든스가 말한 국가는 조직화된 폭력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 거죠.

 

지즈코, 1916년 일차 대전이 터지자 버지니아 울프가 남긴 말, 기억하나요? “나는 더 타임스 아침 신물을 읽으면서 더욱더 페미니스트가 되어가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이 반역적인 남자들의 연극(전쟁) 속에 또 하루를 더 보내야 할 것인가? 활기찬 젊은 여성이 선두가 되어 여성들을 한데 모아 전쟁을 끝장낼 때가 되지 않았는가?” 1915년 여성 평화회의에서는 국가 경쟁의 정치 대신 협력과 환대의 정치가 가능할까?”를 두고 대토론이 열렸다고 하죠. 근대에 들어와, 그것도 과학기술의 발달로 피임법이 가능해지면서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던 여성들이 대거 제국의 일원으로 초대를 받았고 그 사회에 참여하면서 사회의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게 되죠. 그리고 우리 같은 여자들이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거죠. 이제 우리는 인류사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폭력적 문명의 바깥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 이전곧 선사시대의 삶을 참고하면서 역사 이후’, ‘국가 이후’, ‘제국 이후의 삶을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재작년 12월 한국의 계엄령 사태에 누구보다 빨리 여의도 광장으로 뛰어간 한국의 젊은 여성들 소식을 들었나요? 추운 겨울 광장을 지키며 밤을 새웠던 이들, 트랙터를 몰고 상경하던 농민들을 장갑차가 막고 있다는 소식에 달려가 그들 곁에 섰던 이들. 그곳으로 달려간 젊은 여성들은 거대한 이념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그곳에 가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자신이 사랑하는 연예인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할 수 없어서 광장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의지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고양이를 돌보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나간 것이지요. 나는 이들이 국가의 본질을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이들에게는 ‘4세대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죠. 결혼, 출산, 연애, 섹스를 거부하는 이들의 선택은 단절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만들겠다는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의도 광장에서, 남태령에서 그들이 보여준 것은 돌봄과 책임과 배려였고 돌봄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지즈코가 편지를 마감하면서 언급한 다메렌 친구들 말이에요. 나는 그 친구들은 1990년대 동경을 들락거릴 때 자주 만났었어요. 그들은 와세다 대학 근처에서 활동했는데 대학 구내식당이 가격을 마구 올린다고 캠퍼스 곳곳에 진을 치고 나베요리를 해 먹으며 즐거운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어요. 막 아기를 낳은 어린 엄마가 아기를 함께 키울 사람들을 구한다니까 달려가서 아이를 함께 키워주기도 했지요. 그 아이가 커서 어릴 때를 회고하는 EBS 다큐를 얼마 전에 보았어요. 아름다운 다큐였어요. 지즈코는 발족식에서 사회를 바꿀 수 있냐는 질문에 그들이 아니라고 답해서 맥이 풀렸다고 했는데, 그들이야말로 존재 자체로 사회를 바꾸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즈코 표현대로 회사에 종속된 사축, 집에 종속된 가축도 되기를 거부하고 제3의 길을 가고자 한 그들이야말로 제국 이후의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그들은 몸의 힘을 풀고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고 서로 어울리고 서로를 돌봅니다.

 

1998년 방문 때 나는 한국의 전국백수연대 대표와 동행했었어요. 서로 만나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가자고 했죠. 다매렌 친구들은 연신 에너지 충만한 한국 대표를 보고 감탄했고, 주 대표는 무기력한그들을 안타까워하면서 한 수 가르쳐주려고 무진 애를 썼죠. 상황이 눈에 선 하죠? 그런데 그들은 서로 감탄하고 안타까워할 뿐 만나지 못하더군요. 집중적 에너지, 군대를 다녀온 다부진 몸, 목적이 분명한 한국 대표와 분산적 에너지,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느슨한 몸, 의도를 갖지 않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다매렌 친구들은 결국 만남의 접점을 찾지 못했어요.

 

30년에 지난 지금, 한국에도 다매렌 족이 생겨나고 있어요. 병역 거부를 하는 청년들, 지리산에서 널브러져 지내고 있는 청년들, 후쿠시마에 가서 살아보겠다고 떠날 채비하는 친구, 그리고 여기 선흘 그림 할머니 작업장에서 길에서 비실거리던 닭을 구출해 주위에 조언을 구하며 살뜰하게 보살피는 청년 목수, 이들은 다매렌 친구들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들은 남태령에 갔던 여성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테죠. 서로 어울리며 양육자의 삶, 공생자의 시간을 만들어가던 다매렌 친구들이 보고 싶군요.

 

곧 벚꽃이 피겠죠? 홍태옥 그림 할머니가 4.3의 나쁜 놈들을 로즈마리의 향기로 쫓아버리듯, 그 꽃의 향기에 홀려서 전쟁이 끝나길 기도하며

 

 

202643일 선흘에서 눈이 침침해진 혜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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