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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걱정하기 전에 내 주변부터 (우에노 두번째)

조한 2026.04.27 07:51 조회수 : 0

조한혜정에게쓰는 두번째 편지

세상 천하를 걱정하기 전에 내 주변부터 즐겁게

 

혜정,

제주도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시작했던 이 편지, 그 두 번째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쓰고 있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겠죠. 일본에서는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의 정권이 국민을 농락한자기편의적인 의회 해산, 뒤이은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일본 사회, 그것도 보수 여당에서유리 천장을 깨뜨린 이 여성 총리를 환영할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이 여성은 이전부터 강경 매파였습니다. 언론 장악을 담당하는 총무대신 시절 매스미디어를 향해 위압적인 발언을 되풀이했을 뿐만 아니라, 젠더 정책에서도 선택적 부부 별성(역자 주:부부가 결혼할 때 각자의 성을 유지하도록 선택할 수 있는 제도로, 1996년 일본에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 문제의 해소책으로 제시되었으나 2026년 현재에도 도입이 유보되고 있다.) 반대, 동성혼 반대 등 반()페미니즘적인 정책을 주장해 왔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그녀가 매파 색채를 더 강화한 것은 보수 여당인 자민당보다 더 우경화된 배타주의 정당인 참정당이나 일본보수당으로 흘러간 표를 되찾기 위한 노림수였는데, 그 의도가 적중했습니다. 중의원 전체 의석의 과반수를 넘어서, 헌법 개정을 발의할 수 있는3분의2를 확보했으니까요. 그녀는 고() 아베 신조 총리가 총애하던 인재이자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인물 중 하나입니다. 아베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우리 페미니스트들은 가장 위험한 정권이 등장했다고 경계했었는데, 다카이치 정권은 아베 정권보다 더 위험한 정권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혜정, 당신도 한국에서 군사 독재 정권을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조금도 환영하지 않았다고 말했었죠. 아시아에는 이미 여러 명의 여성 국가 원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대부분 건국 영웅의 아내이거나 딸이었지요.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암살당한 니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의 미망인,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는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딸입니다.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간디는 산아 제한을 위해 강압적인 불임 수술을 권장해서 민심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들 여성 원수들은 말하자면 세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카이치는 세습 정치인이 아닌 서민 출신으로,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선출된 수상이라는 점이 단숨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녀는 존경하는 정치인이 영국의 첫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라고 말합니다. 확실히 출신이나 경력이 비슷합니다. 보수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점이나 군사력을 우선시하는 무단 정치(武斷政治)를 지향하는 점도 닮았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미 여성 정치인들이 배출되었고, 여성의 정치 참여가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 검증 가능한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퍼블릭 리소스 센터와 사회조사지원기구 치키라보와 함께 <‘여성 정치인’·‘여성 후보자증가의 사회적 영향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1980년부터2011년까지30년 동안 민주주의 선진국 22개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 의회 할당제(쿼터제)를 도입한 이후 어머니의 취업을 촉진하는 육아 관련 지출은 증가한 반면, ‘어머니의 취업을 제한하는 가족 수당지출은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또한 주마다 낙태 규제가 다른 미국에서는 주의회 여성 의원 비율이30%가 되면 낙태 규제에 관한 주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백래시가 몰아치면서, 대법원이1973년 낙태를 합법화한로 대 웨이드판결(역자 주: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헌법상으로 인정한 판결)을 뒤집으며 낙태를 다시 불법화해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기를 낳거나 혹은 낳지 않을 자유는 여성에게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권리입니다. 21세기에 그 권리가 부정되다니요.

 

흥미로운 지점은 다음과 같은 고찰입니다. 입법부에 여성 의원이 늘어나면 국방비가 감소하는 반면, 행정부 수반이나 각료에 여성 정치인이 늘어나면 국방비 지출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대처 총리가 좋은 예입니다. 재임 중 남반구의 작은 섬 포클랜드 제도에 해군 군함을 파견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무단 정치를 감행했습니다. 다카이치 총리 역시대만 유사시를 언급하며 중국의 신경을 건드린 끝에 국방 예산을 증액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조사 보고서는 이러한 경향을여성은 외교 정책에서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해석으로 설명합니다. 여자라서유약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자보다 더 남자답게 행동하는 것이것을 사회학의 정체성 이론에서는과잉 동일시(over-identification)’라고 하지요. 소수자가 주류 집단에 진입할 때, 주류보다 더 주류처럼 행동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다카이치 총리를 보고 있으면 이 경험칙이 잘 들어맞는다고 느낍니다.

 

이 조사 보고에서 밝혀진 또 다른 사실은, “정당인가 젠더인가?”라는 질문에서 어느 정당의 의원이든 남녀를 불문하고정당 퍼스트라는 점입니다. 이 조사 결과대로라면 미국 공화당의 여성 의원이낙태 반대를 외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다카이치 총리가선택적 부부 별성 반대를 주장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보수당 내에서 승승장구할 수 없었을테니까요.

 

보수적인 남성들은 여성을 반()여성 정책의 앞잡이로 내세우는 데 능숙합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구도를 만들고 싶은 것이겠죠. 보수 논단에는 여성 논객을 위한지정석이 있어서, 그곳에 합류하면 남성들이 박수갈채를 보내줍니다. 야망이 있는 여성이 그 자리를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여성들이 남성조차 입에 담지 못할 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으며 자폭해 가는 모습을 보며, ‘, 저렇게 여성이 소모품처럼 버려지는구나하고 가슴아파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처럼 견고한 보수 남성들의 갈채를 받으며 등장한 여성 총리가 바로 다카이치 씨입니다. 그 남성들은 그녀가여자라서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보수적인 정책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카이치 총리의 높은 지지율을 견인하는 여성 유권자들은 어떨까요? 젊은 여성의 지지와 중장년층 여성의 지지 이유는 다른 것 같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여성이 드디어 유리 천장을 깨뜨렸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환영하는 듯이 보입니다. 한편, 61년생인 다카이치 총리와 비슷한 세대의 여성들은85년에 도입된 남녀고용기회균등법 (역자 주: 일본에서 직장 내 성차별을 최초로 법적으로 문제화하고 여성의 고용 기회를 보장한 성평등 고용법) 이후 사회인이 된 세대입니다. 남성 사회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벽처럼 앞을 가로막은 보이즈 클럽에서 그들과 영합하거나 눈치를 보며 느꼈던 고통과 분통터짐을 몸소 체험한 서바이벌 세대이지요. 정계에서 살아남아 이 정도 지위까지 오른 다카이치 총리에게 스스로를 투영하며 느끼는 이해와 동정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앞으로의 재임 기간4년 동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스파이 방지법(역자 주:국가 기밀을 외국에 넘기는 스파이 활동을 처벌하는 안보 법률로 언론 자유와 시민권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이 제정되고, 일본판CIA(역자 주:총선에서 자민당을 포함해 보수 정당은 미국의 CIA와 유사한 활동을 벌이는 정보 기관 대외정보청설치를 공약했다.)가 설치되며, 군비가 확대되고, 일본이 무기 수출국이 되고, 헌법이 개정되고, 자위대가 당당히 국군이 되며, 긴급사태 조항이 성립되고이렇게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합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정권의 임기가 아직3년 남았습니다. 트럼프 정권의 미국에 비하면 일본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봄에 미국 대학에서 할 초청 연설에서는우리는 불행히도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까 싶을 정도입니다.

 

트럼프 재선 이후에 일본의 한 재계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에, 그는 내게“4년만 참으면 됩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미국 친구는 그4년 동안 수많은 것이 파괴될 것이고, 한 번 파괴되면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일본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듯한 예감입니다.

 

어두운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해요. 제주도의 멋진 추억으로 돌아가 볼까요.

 

왜 제주도로 이주했는지 지난 편지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어 고마워요. 당신이 평생의 과업 중 하나로 삼아온 대안학교 거점이 제주도에 있고, 그곳을 염두에 둔 아이들과 부모들이 도시에서 이주해 오는 선순환이 생긴 것이네요. 아이들이 자연과 접하고 자유롭게 클 수 있다는 점에서, 풍요로운 바다와 땅이 있는 제주도는 최고의 장소일 것 같아요. 한국의 부모들은 교육열이 대단하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승자 독식의 경쟁 사회에 아이들을 적응시키는 교육에 회의를 느낀, 의식있는 고학력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이주하는 것이겠지요. 일본에도 부모의 그런 바람을 이뤄주는 학교가 지방 몇 곳에 있습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하지만 교육의 장을 선택하는 것은 부모, 그리고 그 부모는 맹모처럼 대부분 어머니입니다. 제주에서 제가 묵었던 장단기 체류자를 위한 숙소레이지마마에는 아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이주해 온 엄마가 있었습니다. 숙소 이름은레이지(게으른) 마마였지만, 그녀는 게으르기는커녕 아이 등하교와 지원에 온 힘을 쏟고 있더군요. 남편은 서울에 있고 한 달에 몇 번 제주도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아마 수업료는 일반 공립학교보다 비쌀 것이고, 이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겠지요. 그리고 이 땅에서 풍요로운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졸업하면 섬을 떠나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이주라고는 하지만 기간이 한정된 교육 목적의 이주인 것입니다. 남편은 홀로 직장 생활을 계속하겠지만 아이와 함께 온 아내들은 직업이 없습니다. 어쩌면IT 시대에 걸맞게 원격 근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교육을 위해 가족이 떨어져 산다는 것어딘가 마음이 짠합니다. 한국에는기러기 아빠라고 해서, 아이를 해외 유학 보낸 곳에 어머니가 동행하고, 혼자 남은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며 기러기처럼 오가는 교육열 높은 부모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본토에서 보면 제주도는해외나 다름없겠네요.

 

그런데 제주도 하면 역시 해녀의 섬. 당신이 인류학 조사 필드로 제주도를 택한 것은 해녀들의 자립적인 삶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지요. 할머니 화가들의 갤러리를 둘러보며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들의 환한 미소와 거침없는 자기주장을 보고 있으면, 그 모습은 그동안 억눌려 있었다가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졌다기보다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돈줄을 움켜쥐고 아이를 키워내고 때로는 남편까지 먹여 살려온 여성들의 자신감이 빚어낸 결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바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전직 해녀들에게 뭍에서의 자기표현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 바로 그 갤러리였던 것이었죠. 당신의 연구 관심이 처음부터 자립한 여성들에게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페미니즘적이라 불러도 좋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도 노토(能登)나 이세(伊勢) 지역에 해녀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나이가 들어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뒤를 이을 사람은 있을까요? 요즘은 잠수복을 입고 산소통을 짊어진 다이버들이 성게나 전복을 싹쓸이해 간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해녀는 이제 관광 자원으로만 남아 있는 것일까요?

 

해녀 뿐 아니라 한국 여성들은 예전부터 경제권을 꽉 쥐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백수(白手)’는 문자 그대로하얀 손’, 즉 일하지 않아 더럽혀지지 않은 손을 의미합니다. 양반 계급 남성에게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학문에 힘쓰는 것이 일, 그리고 그 아내는 집안일로 남편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 경제를 도맡아 관리하며 남편을 출세시키는 것이야말로 아내의 역량이라는 것이겠지요. 일본 여성에 비해 한국 여성들이 경제 관념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듯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까요?

 

지금은 백수가 실업률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무직 청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20여 년 전, 당신이 서울에서 백수 청년들을 데려와 일본다메렌(だめ, 역자 주: ‘다메(だめ)’는 일본어로 안된다’, ‘실패했다’, ‘형편없다라는 뜻으로, ‘다메렌쓸모없는 인간들의 연합이라는 뜻이 된다.)’의 청년들과 교류하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지요. 결혼도 안 돼, 취업도 안 돼, 모조리 다 안 되니까다메렌이라고 이름 붙였다지요. 다메렌의 청년들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점잖은 아저씨들이 되었습니다. 리더 중 한 명인 페페 하세가와(ペペ長谷川) 씨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2024년에는 또 다른 멤버인 가미나가 고이치(神長恒一) 씨와 공저로<다메렌의 자본주의보다 즐겁게 살기 だめ資本主義よりたのしくきる>겐다이쇼칸 現代書簡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30년 전다메렌이 발족했을 즈음에 그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 대화를 나누었어요.

다메렌은 사회를 바꿉니까?”

안 되겠지요(다메데쇼). 다메렌이니까요.”

 

맥이 풀렸습니다.

 

그렇게 맥이 풀린 상태 그대로, ‘사축’(社畜, 역자 주:회사에서 길러지는 가축이라는 자주적인 표현으로, 회사에 종속되어 자신의 삶이 없어진 노동자를 뜻한다.)도 가축도 되지 못한 채 탈진한 삶의 방식을 고수한30. 그 때의 청년들이 환갑을 맞이합니다. 사회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자유롭게 살겠다. 자본주의가 글로벌화, 신자유주의화되어 점점 더 가혹한 경쟁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을 때, 그쪽보다 이쪽이더 재미있다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의 방식.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서 한 명, 저기에서 한 명, 점점 더 늘어나면서 이 사회도 숨통이 트이기를. 세상 천하를 걱정하기 전에 내 주변부터 즐겁게 만드는 일에 정진해 볼까요.  지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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